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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이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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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카 이사지는 1906년 교토부 출생으로,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1942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후 총 15번 당선되었으며, 무소속, 민주당, 자유당을 거쳐 1955년 자유민주당에 참여했다. 중의원 부의장, 국무대신,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1976년 록히드 사건 조사 특별위원장으로 고다마 요시오를 심문했다. 법무대신 재임 중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발언으로 주목받았으며, 1980년 해프닝 해산 당시 자민당 공천을 거부하고 탈당하여 198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사형 집행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1987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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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이사지
기본 정보
다나카 이사지
이름다나카 이사지
원어 표기田中 伊三次
로마자 표기Tanaka Isaji
출생일1906년 1월 3일
출생지교토부
출신 학교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
이전 직업변호사
소속 정당( 무소속 구락부 → )
( 민주당 → )
( 자유당 → )
( 자유민주당 → )
무소속
칭호와 훈장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법학박사
경력
직책제22-23・31대 법무대신
내각제1차 사토 제3차 개조 내각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임기 시작1966년 12월 3일 - 1967년 11월 25일
1972년 12월 22일
임기 종료1973년 11월 25일
직책제44대 중의원 부의장
임기 시작1963년 12월 7일
임기 종료1965년 12월 20일
직책제7-8대 자치청 장관
내각이시바시 내각
제1차 기시 내각
임기 시작1956년 12월 23일
임기 종료1957년 7월 10일
직책중의원 의원
선거구구 교토 1구
당선 횟수15회
임기 시작1942년 5월 1일 - 1947년 3월 31일
1949년 1월 24일
임기 종료1983년 11월 28일

2. 생애

교토부 출신으로, 1934년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교토 시 의회의 교토 부의 (府議)를 거쳐, 1942년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翼賛選挙, 익찬 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되었다. 이후 통산 15번 당선되었다. 무소속, 민주당, 자유당을 거쳐, 1955년 보수 합동으로 자유민주당에 참여하였다.

중의원 부의장, 중의원 록히드 문제 조사특별위원장, 국무대신, 자치청 장관 (이시바시 내각, 제1차 기시 내각), 법무대신 (제1차 사토 내각 제3차 개조 내각,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자민당 상담역, 자민당 고문, 자민당 사법제도조사회장, 자민당 당기 위원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76년에는 록히드 문제 조사 위원장으로 고다마 요시오 (児玉 誉士夫, 일본 정재계의 흑막으로 불림.)를 임상 조사했으며, 법무대신을 역임할 당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에선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의 관여를 암시하는 육감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1980년 해프닝 해산 (ハプニング解散)[13] 이후 자민당의 공천을 거부하고 탈당했으며, 1983년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987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 신카라스마에서 태어났다.[1] 효고현・소요시의 차남[2] 리츠메이칸 중학교, 부립 제2 중학교를 거쳐 리츠메이칸 대학에 입학했다.[1] 1931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3] 변호사 시험에 합격, 등록했다.[1]

1934년,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를 졸업[4] 변호사를 개업했다.[2] 교토 시의회 의원, 교토부 의회 의원을 거쳐, 1942년의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많은 의원이 대정익찬회의 추천을 받았지만 (익찬 선거), 다나카는 비추천으로 당선되었다. 전후에 공직 추방되었지만, 1949년에 부활, 통산 15기[4]

무소속 구락부, 민주당, 자유당을 거쳐, 1955년보수합동에 의해 자유민주당의 결당에 참여했다. 자민당에서는 오가타파→이시이파에 소속되어, 이시이파가 해산된 후에는 미키파에 들어갔다.

1956년, 이시바시 내각에서 자치청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시바시 탄잔은 곧 병으로 총리를 사임, 후임의 기시 노부스케에 의한 제1차 기시 내각에서도 자치청 장관에 유임했다. 1963년, 중의원 의장・후나다 주 밑에서 중의원 부의장에 취임하여, 1965년까지 약 2년간 재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임명되어 2번째 입각. 제2차 사토 내각에서도 유임하여, 1972년에는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다시 법무대신에 취임했다.

1976년, 록히드 사건 조사를 위해 중의원에 설치된 록히드 문제 조사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에 취임하여, 고다마 요시오를 임상 심문. 사건에 관여한 혐의가 강한 회색 고관의 성명을 공표했다.

1980년, 해프닝 해산에 즈음하여 총리오히라 마사요시와 오히라 정권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반대 자세를 명확히 하며, 자민당으로부터의 공천을 거부한 후 자민당을 탈당했다[5]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 다나카의 지반은 전 대장관료이부키 분메이가 계승했다.

1987년 (쇼와 62년) 4월 11일에 81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변호사 활동

다나카 이사지는 1906년 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 신카라스마에서 태어났다.[1] 효고현・소요시의 차남으로,[2] 리츠메이칸 중학교, 부립 제2 중학교를 거쳐 리츠메이칸 대학에 입학했다.[1] 193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3]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등록했다.[1] 1934년 리츠메이칸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4] 변호사 개업을 했다.[2]

2. 2. 정치 경력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출신으로, 1934년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 야간부를 졸업하였다.[1][4] 교토 시의회 의원, 교토부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2] 1942년 제2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익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전후에 공직 추방되었다가 1949년에 복귀, 통산 15번 당선되었다.[4]

무소속 구락부, 민주당, 자유당을 거쳐,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자민당 내에서는 오가타파→이시이파→미키파에 속했다.

1956년 이시바시 내각에서 자치청 장관으로 첫 입각했고, 이시바시 탄잔 총리 사임 후 기시 노부스케제1차 기시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1963년 중의원 의장 후나다 주 밑에서 1965년까지 약 2년간 중의원 부의장을 역임했다.

1966년 제1차 사토 제3차 개조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두 번째 입각, 제2차 사토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재임되었다.

1976년 중의원 록히드 문제 조사특별위원장으로 고다마 요시오 증인 심문을 했다.[1] 법무대신 재임 중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에선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KCIA)의 관여를 암시하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1980년 해프닝 해산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며 자민당 공천을 거부하고 탈당했다.[5] 1983년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 은퇴했다. 후임은 이부키 분메이이다. 1987년 4월 11일 81세로 사망하였다.

2. 3. 록히드 사건

1976년 중의원 록히드 문제 조사특별위원장으로서 록히드 사건 조사를 지휘하였다.[13] 고다마 요시오를 증인으로 불러 심문하였으며, 사건에 연루된 '회색 고관'들의 실명을 공개하였다.

2. 4.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 법무대신 재임 중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나카 이사지는 같은 해 8월 23일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우리에게는 중요한 육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육감에 따르면, 이 나라에 틀림없고, 이 나라의 비밀경찰이 한 짓에 틀림없다는 생각까지 가슴속에 떠오르고 있습니다…"라고 발언하여[10][11], 대한민국 중앙정보부(KCIA)의 관여를 시사하는 '육감'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12].

2. 5.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

다나카 이사지는 법무대신 재임 중 사형 집행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9] 1967년 10월 13일, 다나카는 대신실에 신문기자들을 모아 염주를 한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며 23명에 대한 일본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고, 이를 기사화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기자들을 어이없게 만들었고, 어떤 신문사도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나카는 제출된 사형 집행 명령서 중 제국은행 사건의 피고인 히라사와 사다미치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것(히라사와)은 억울한 누명이잖아"라며 서명하지 않았다.[7][8] 또한, 법무대신 취임 후, 아는 기자에게 "사형이 집행되는 곳을 보러 가자"라고 권유했으나, 법무성 형사국 총무과장 이토 에이키는 경솔한 행동이라며 그를 질책했다.[9]

3. 사상 및 신념

전전에 다나카는 "천황 귀일의 대정신을 국민 생활에 현현하여, 신민 사상의 일대 통일을 꾀하고 싶다", "대동아 전쟁을 이기기 위해 일본적 전체주의에 의해 세계 최강도의 국방 국가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정견을 밝혔다.[1]

4. 평가

5. 가족

다나카 이사지의 아버지는 다나카 소키치[2]이며, 아내는 다나카 요시코[2](1908년 - ?)이다.[3] 자녀로는 아들과 딸이 있다.[3]

6. 저서

6. 1. 단독 저서


  • 《新憲法の解明일본어|신 헌법의 해명》 (扶桑閣일본어|후소카쿠), 1946년 10월
  • 《理想主義政治学の原理일본어|이상주의 정치학의 원리》 (新光社일본어|신공사), 1947년
  • 《憲法の心―新憲法の基本原則일본어|헌법의 마음 - 신 헌법의 기본 원칙》 (三和書房일본어|산와서방), 1952년 3월

6. 2. 박사 학위 논문

wikitext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1949년 4월에 《이상주의 정치학의 이론 구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참조

[1] 간행물 翼賛議員銘鑑 https://dl.ndl.go.jp[...] 국립국회도서관디지털컬렉션 2016-02-05
[2] 간행물 人事興信録 第14版 下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6-07-21
[3] 서적 大衆人事録 第二十三版 西日本編
[4] 웹사이트 田中 伊三次とは https://kotobank.jp/[...] 2016-02-07
[5] 문서
[6] 서적 自治官僚 講談社
[7] 서적 死刑の考現学 三省堂
[8] 서적 政治家の風景 학습연구사
[9] 서적 死刑の考現学 三省堂
[10] 간행물 参議院会議録情報 第071回国会 法務委員会 第17号 昭和四十八年八月二十三日 https://kokkai.ndl.g[...]
[11] 뉴스 「某国機関の犯行」法相答弁 朝日新聞 1973-08-24
[12] 뉴스 脅迫電話が相次ぐ-田中法相らの身辺を警護 毎日新聞 1973-08-24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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